丁酉春刊
정유년(1477년) 봄에 간행한
驪興閔氏族譜薦序
여흥민씨족보의 서문을 씁니다
凡人之生皆有基源稷之生出於 姜源契1之生出於簡狄2 伊尹起於莘野3 太公興於渭濱4
무릇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 근원이 있는 것은 강원설을 낳은 간적이나, 신야들에서 일어난 이윤이나, 위빈에서 태공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古人之 出處 稽諸經史 則 可見矣 不惟5中國之人爲然 我國之 名公鉅相 或 稱某州 之人 或 稱某邑之 吏 至於 閔氏豈 無世系之 遺譜也
옛날 사람이 태어남은 모두 경사에서 볼 수 있지만 중국사람이 그러한 것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의 명공이나 거상들이 혹 어느 지방 사람이고, 혹 어느 고을 출신의 관리라고 말들하지만, 민씨에 대해서는 그 출신을 알 수 있는 문헌이 없습니다.
然 家無相傳之譜 或者以爲來自中華 或者以爲 出于驪水 皆無明譜 不足信也
집안에 전해지는 보첩이 없어 혹자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여주강가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족보에서 밝힐 수 없기에 믿기가 어렵습니다.
宜矣但 李相國奎報 上常侍閔湜詩 曰 世家傳 閥閱6系出費候賢 盖 閔子騫爲費候則 來自中華之論似矣
다만 고려조 상국 이규보가 상시 민식에게 올린 시에 따르면 대대로 전해오는 문벌은 비후로부터 시작되고, 비후는 민자건의 관직이므로 중화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비슷하다.
而湜 令謨之長子 去古來遠 李相國亦 博學鴻儒7不必傳會以爲說也
식은 영모의 큰아들이고 과거에 먼 곳을 다녀왔고, 이상국 역시 박학홍유하여 이 설을 위하여 만나서 상의한 것은 아닐 것이다.
余嘗粗涉古書 내가 일찍 옛 서적을 살펴보니
我祖 尙衣奉御 閔稱度 生 檢校少保 行監察御使 世衡
나의 상의봉어 민칭도 할아버지는 검교소보 행 감찰어사 세형을 낳고,
世衡 生 檢校尙書 左僕射 行 戶部員外郞 懿 古名 憼
세형은 검교상서 좌복야 행 호부원외랑 의(옛 이름 경)을 낳고,
懿 生 金紫光祿大夫開府儀 同 三司 門下侍郞 同 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 太學士 判尙書 吏部事 監修 國史上柱國 太子太師 贈諡 文景公 令謨 仁宗 戊午年 及第
의는 금자광록대부개부의 동 삼사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 집현전 태학사 판상서 이부사 감수 국사상주국 태자태사 증시 문경공 영모를 낳았는데, 인종 무오년에 급제하였다.
令謨 生 金紫光祿大夫 守 太保門下侍郞 平章事 集賢殿 太學士 同 修國士 判兵部 事 太子少保 贈諡 定懿公 公珪 古名嗣 忠明宗 丁酉年 及第
영모는 금자광록대부 수 태보문하시랑 평장사 집현전 태학사 동 수국사 판병부사 태자소보 증시 정의공 공규(옛 이름 사)를 낳았는데, 충명종 정유년 급제하였다.
公珪 生 正議大夫 判大府事 三司使 翰林學士 充史館 修撰官 知制誥 太子左 諭 德 仁鈞 古名洪貴 熙宗 乙丑年 及第
공규는 정의대부 판대부사 삼사사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태자좌 유덕 인균(옛 이름 홍귀)을 낳았는데, 희종 을축년 급제하였다.
仁鈞 生 朝敢大夫 尙書吏部侍郞 滉 甲辰年 乙科 第二人
인균은 조감대부 상서 이부시랑 황을 낳았는데 갑진년 을과 이등으로 급제하였다.
滉 生 重大匡僉議贊成事 上護軍 判㧾部事致仕 贈諡 忠順公 宗儒
황은 중대광첨의찬성사 상호군 판홀부사를 지내고 충순공 시호를 받고 종유를 낳았다.
宗儒 生 匡正大夫 判密直司事 進賢館 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贈諡 文順公 頔
종유는 광정대부 판밀직사사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이며 문순공 시호를 받은 적을 낳았다.
頔 生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上護軍 渙
적은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호군인 환을 낳았다.
渙 生 朝敢大夫書 雲副正 輻
환은 조감대부 서운부정 복을 낳았다.
輻 生 縣監安慶 至于 我身 盖 十三世也
복은 현감 안경을 낳았는데 이는 내게는 십삼세이다.
其先世之種 德培植 悠久而 不息 代有科名顯秩者 不可盡擧如
윗대 선대 조상이 뿌린 덕은 크게 뿌리내려 유구히 이어지고,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는 등 명현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令謨之 夢見 帝香(?) 傳說之 外無聞焉.
영모의 현몽과 같은 군왕이 주신 전설도 있거니와 그 외는 들은 바가 없다.
閔公珪 有子 五人 長曰 康鈞 次曰 迪鈞 次曰 仁鈞 次曰 良鈞 次曰 光鈞 幷登金榜8
민공규는 아들을 다섯을 두었는데 맏이가 강균이고 다음이 적균, 그 다음이 인균, 그 다음이 양균, 막네가 광균이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而光鈞之經義播詠歌章 至 黙軒 閔漬 及庵 思平9 漁隱霽 驪興君 汝翼10 及庵公 外孫 惕若齋 金九容 皆 名儒也 漬담글지,霽갤제,惕두려워할척
광균의 경의의 파영가 가락의 영향을 받은 묵헌 민지, 급암 사평, 어은제 여흥군 여익, 급암공 외손 척약재 김구용 등은 모두 뛰어난 유학자이며,
而 功名事業 彰著後世者也
이러한 공신사업은 후세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崔拙翁11 作 文順公墓誌 曰 世以文雅致位高顯 爲東國 令族之冠信矣
최졸옹이 문순공 묘지에 쓰기를 ‘세대를 이어 글의 우아함이 선대를 높이 드러내니 동국의 이름난 집안의 우두머리로다.’라 하였다.
且高麗王氏 擇 定婚姻以 驪興閔氏 坡平尹氏 仁川李氏 鐵原崔氏 爲甲族
또 고려왕씨가 국혼을 택정하는 집안은 여흥민씨, 파평윤씨, 인천이씨, 철원최씨 집안으로 그 중 갑족이라.
故 閔頔之婿 尹繼宗之女 作配 忠惠王 是 爲 禧妃 生 忠定王 迄 于 當代 左議政 霽 生 元敬王后12 而作配于 太宗大王 乃誕 世宗大王 迄이를흘,
민적의 사위 윤계종의 딸은 충혜왕의 왕비 희비가 되고, 충정왕 흘을 낳았으며, 또 당시 좌의정 제는 원경왕후를 낳고 태종대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세종대왕을 탄신했다.
世宗傳 文宗 文宗傳 魯山13魯山 禪位于 世祖大王 世祖傳 睿宗 睿宗傳 主上殿下 金枝玉葉 繼繼承承 其麗不億而 萬有千歲 與天地同其矣
세종은 문종에게 전위하고, 문종은 노상에게 전위하고, 노산은 세조대왕에게 전위하고, 세조는 예종에게, 예종은 주상전하에게(성종) 전위하시니 금지옥엽은 계계승승 이어져 그 영예로움은 잊혀지지 않고 만세 천세 하늘과 땅과 함께 할 것이다.
嗚呼 生乎 千載之下欲明千載之 上難矣載
오호, 천재지하에서 나서 천재지상을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라.
然後之視令 猶令之視古傳于 前者 雖未明 垂于後者 猶無窮 不可不 明白以傳
후일에 금일을 보는 것은 금일에 옛날을 보는 것과 같아서 앞날로 전하는 것이 비록 분명치 못하나 후일에 전하는 것은 오히려 무궁한 것이니, 불가불 명백히 전해야 할 것이다.
故凡關閔氏之事咸錄于後以示雲仍爾
고로 무릇 민씨 집안에 관한 일은 모두 후전에 기록하여 원대 후손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驪州閔氏之本貫也 初稱黃驪縣 所以 稱 黃驪者 黃驪 二馬出 於 水 故因 以 名之
여주는 민씨의 본관이다. 처음 황려현이라 했는데 황려란 말은 황려 두 마리가 강물에서 나온 것에서 이름 지어진 것이다.
厥後以 禧妃14之外鄕叔爲郡 逮我朝以 元敬王后內鄕 叔爲都護府使 至 戊子歲 世宗大王 移葬 于 英陵 陞爲 牧 筆川寧縣 合屬于州 而 特設牧判焉 此皆大略也
그 후, 희비의 외가 고향으로 군으로 승격되고, 아조에 이러러 원경왕후의 고향으로 도호부사로 승격되고, 무자년(1498년) 세종대왕릉을 영릉으로 이장한 후 牧으로 승격하여 천령현을 합속하여 목판을 특징하였으니 이것이 대략을 기록한 것이다.
성종 십사년(1478년) 여름 교서교리 여강 민규 자문서
(인물 설명)
按公 成廟朝人也 去前朝未遠 故序中敍系頗得其詳 令之觀者宜有取焉
이 분은 성종조 조정의 인물이다. 전 임금이 물러난지 오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문을 씀으로 계파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책을 읽는 사람은 마땅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第此序文 獨存而其時譜書及錄 于後者皆不可得 而復見敍中 所謂 後之視令 猶令
之視古者 不其然乎可恨也
이 서문은 당시 족보 및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이고 후인들이 모두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시 그 서술된 부분을 보면 소위 후인들이 지금을 보는 것은 오히려 지금 사람들이 옛 선인의 행적을 본받아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己0閔奎見玄律字
기0년 민규견 현율자.
- 강원설: 간적이 낳은 아들. [본문으로]
- 간적: 중국 고대 사람. 유융씨(有娀氏)의 장녀(長女). 제왕(帝王)이 고신씨(高辛氏)인 제곡(帝嚳)의 비(妃). 제비[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契)을 낳았다고 함. [본문으로]
- 신야:중국 신(莘)나라의 들로서, 이윤(伊尹)이 은거할 때에 농사짓던 곳. 이윤은 신야에 은거하고 있다가 탕왕(湯王)의 세번에 걸친 초빙에 따라 출사(出仕)하여, 탕을 도와 하(夏)의 걸왕(傑王)을 토벌함. [본문으로]
- 위빈: 산시성의 지역이름. [본문으로]
- 불유: …뿐만 아니라 [본문으로]
- 벌열: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 [본문으로]
- 박학홍유: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고 덕행이 높아 이름난 유학자,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넓고 크게 세우는 계획 [본문으로]
- 금방: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사람의 이름을 쓴 방(榜) [본문으로]
- 민사평: 1295(충렬왕 21)~ 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시서(詩書)를 즐기고 학문에 힘을 써서 이제현·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6편의 소악부를 남겨 한시가 민족문학으로서 적극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庵). 찬성사 적(頔)의 아들이며, 정승 김륜(金倫)의 사위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수찬(藝文春秋館修撰)·예문응교(藝文應敎)·성균대사성·감찰대부를 거쳐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한 1348년 도첨의참리(都僉儀參理)가 되었다. 그뒤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의 호가 주어졌고,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동문선 東文選〉에 시 9수가 전하며, 저서로 〈급암집〉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본문으로]
- 민여익: 1360(공민왕 9)∼1431(세종 13).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보지(輔之). 대제학첨의정승(大提學僉議政丞) 지(漬)의 증손으로, 여흥군(驪興君) 현(玹)의 아들이고, 부인은 유수(留守) 곽윤명(郭允明)의 딸이다. 호조판서가 되고, 1420년 7월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이어 보국숭록여천부원군(輔國崇祿驪川府院君)에 봉해지고, 1426년 대광보국여천부원군(大匡輔國驪川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시호는 양경(良敬) 또는 경정(景定)이다. [본문으로]
- 최졸옹: 최해(崔瀣, 1287년~1340년)는 고려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언명부(彦明父), 호는 졸옹(拙翁), 본관은 경주이다. 최치원의 후손이며 충숙왕 때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을 지냈다.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그는 특히 고려의 저명한 문인들의 글을 모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으며, 당대의 문호로서 이제현과 함께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졸고천백(拙藁千百)》《농은집》《귀감》 등이 있다. [본문으로]
- 원경왕후: 본관 여흥(驪興). 성 민(閔). 1365년 여흥부원군(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여흥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년) 두살 아래인 이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인 1392년(태조 1)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되었다. 1400년(정종 2) 2월 세자의 정빈(貞嬪), 11월 왕비가 되어 정비(靜妃)에 진봉되었다.원경왕후 민씨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선수를 쳐 공격하도록 하였고 무기를 숨겼다가 이방원이 거사를 할 때 사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르자 불화가 생겨 고통을 겪었다. 태종은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렸으며 원경왕후 민씨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 결국 친정 남동생인 민무질(閔無疾)·민무구(閔無咎) 형제가 사사(賜死)되는 등의 불행을 겪었다.양녕(讓寧)·효령(孝寧)·충녕(忠寧: 世宗)·성녕(誠寧)의 4대군과 정순(貞順) 등 4공주를 낳았다. 1420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고 능은 헌릉(獻陵)이다. [출처] 원경왕후 | 두산백과 [본문으로]
- 노산: 단종 [본문으로]
- 희비: 고려 충혜왕비 희비 윤씨, 閔頔의 외손녀 [본문으로]
- 교서교리: 교서관 교리는 1401년(태종 1) 교서감을 교서관으로 개편하면서 처음 설치했고, 주로 서적의 간행·향축(香祝), 도장글씨[印文]의 필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본문으로]
- 민규 자문: 자, 자문(子文) 본관(本貫) 여흥(驪興) 부(父) : 민안경(閔安慶) 조부(祖父) : 민폭(閔輻) 증조부(曾祖父) : 민오(閔澳) 과거시험 세종(世宗) 23년,(1441 신유), 식년시(式年試) 등위 : 정과20(丁科20), 관직(官職) :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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