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야기/집안일반이야기

밀양 시향묘사 및 선영 성묘(12.1-12.2)

eungi5 2012. 12. 5. 01:58

 

어려서부터 선친께서 집안 爲先활동을 많이 하시는 모습을 보아왔다.

밀양에 내려 가셔서 몇 달씩 이장도하시고, 비석, 상석 설치 등.

제일 큰 일이 오우정을 중수하시고, 향사를 다시 여신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가끔 집안 일을 등한히 하곤 했는데 이젠 그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알게 모르게 집안에 대해 불안한 위기를 느껴오고 있다.

내 스스로 밀양의 선영의 위치를 다 알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알고 있는 분이 양동, 칠곡,송정종숙 등 뿐이란 사실이다.

더욱 문제는 이 어른들이 모두 팔십 안팎으로 산행을 하기엔 이미 고령이란 사실이다. 아니 정말 이 어른들이 더 체력이 떨어지면 그 땐 어떻게 先塋을 관리한단 말인가. 失墓의 위기가 바로 눈앞이다.

알지도 못하고, 다녀오지도 않은 사람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나 하고, 서울갔다오지도 않은 사람이 이긴다고 말로는 천리나 달린다.

지난 봄, 오우정 향사때 경무를 데리고 구남선영을 다녀 왔고, 올 여름에 전체 선영의 위치도 파악할 겸 성묘를 하기로 하고 칠곡 종숙과 상의를 하였더니 전 산소를 안내해 주시겠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 일을 양동종숙과 상의를 했더니 벌초를 하고난 다음 가야지 여름에 가면 잡초가 우거져 도저히 찾지 못할 것이라 한다. 그 말씀이 맞아 추석뒤에 성묘를 하려 하다가 이왕 성묘할 것 가을에 묘사를 지낼 때 다녀 오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갑자기 칠곡 종숙이 9월경에 덜컥 장유착으로 입원을 하신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이 별로 좋지 않으신 어른이 근 한달을 입원을 했으니 걱정이 많았는데, 이번에 옛날같진 않아도 다닐 정도는 된다고 동행해 주시겠다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안 일이 큰일이다. 묘사나 종사에 참여하는 사람 수가 점차 줄어 든다는 것이다.

올해 차종파 시향묘사에 달랑 아홉명 후손이 참여하였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양동, 칠곡, 송정 종숙과 국골종형, 족숙 두분, 그리고 중기와 우리 부자가 전부다. 우리 부자도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쩔뻔 했나, 등에 진땀이 난다.

 

한골 제실 추원재 뒷편에 있다.

묘사를 한번에 지낸다. 모두 23위 이다.

묘사를 마치고 음복하는 모습. 종손 병욱씨와 병희족숙

12월 1일 토요일

오전에 한골사당에서 묘사를 지내고 국골종형과 구남 산소 성묘를 했다.(5대조 致洪, 조부모 演植, 仲父母 丙祉)

경무가 스마트폰으로 각 산소마다 GPS위치를 지정하고, 설명도 기록하였다. 각 산소마다 이 작업을 완료하면 이젠 잊어도 위치를 찾을 수 있으니 큰 걱정을 덜 것이다.

각 위치마다 주소도 입력하여 자동차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GPS로 찾아 가면 될 것이다.

무량원 앞에서 국골종형과 헤어지고 칠곡종숙과 같이 성묘를 시작하였다.

병욱 族叔의 안내로 용연선영 성묘를 하였다.(14대조 裕, 11대조 孝曾-차종파할아버지)

고미정선영은 칠곡종숙이 손가락질로 대략 산소의 위치를 지적해 주어 올라가서 성묘를 하였다. (13대조 應湛, 12대조 仁復)

파서선영(10대조 輯, 9대조 友華, 8대조 涵洙, 종8대조 啓洙, 종7대조 百熙)

여기까지 성묘를 하고 해가 진뒤 밀양읍에 여관을 잡고 일박을 했다. 저녁은 칠곡종숙이 삼계탕을 원해 우리 부자는 삼겹살에 술 한 잔하고, 같이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비가 부슬부슬 온다. 버스터미널 앞에서 추어탕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성묘를 시작하였다.

한골선영은 선친을 손길이 진하게 묻은 선영이다. 1981년 17대조-除, 16대조-熲 이장 및 비석, 상석 공사를 하셨고, 1984년 無後한 오우정 삼형제분(勗齋公,敬齋公,無名堂公) 이장을 하여 한골선영을 완성하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 모습이 웅장하다.

경무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휘자가 적혀있는 비석도 보여주고 내력을 알려 주었다.

다음은 서전 우우정할아버지 산소 성묘를 하였다. 우리 집안의 선영 중 가장 경관이 좋은 곳이 이 산소이다. 비문은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윤용구의 글이다. 글씨가 참 좋다.

무량원 선영에는 집안의 많은 선조들이 계시는 곳이다.

직계는 8대조비(달성서씨), 7대조(百鎭), 증조고(泳熙), 5대조모(광주안씨)님이 계시고,

백부내외분과 김해형, 둘째집(무량원서쪽), 셋째집(무량원 입구쪽) 종조부, 종숙들이 모두 여기 계신다. 증기형도.

이제 거의 다 왔다. 마지막 동산리쪽만 남았다.

먼저 당곡(땅골) 선영이다. 모두들 말하는 산에 나무가 우거지고 길이 없어 성묘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알려진 곳이다.

종숙이 산 입구에서 예의 손가락질로 대략적인 위치를 말해준대로 길도 없는 산을 올랐다. 한 백여미터쯤에서 8대조비(진양하씨)의 산소를 찾았다. 설명대로 봉분이 높고 잔디가 없이 흙으로 덮혀 있는 산소이다. 참 반갑다. 할머니께 람망이 앞날의 큰 복을 빌기도 했다.

나중에 양동종숙의 말씀으로는 전국의 제일이라는 풍수가가 우리 선영을 다녀 보고, 여러 산소 중 이 산소가 제일의 명당이고 이 산소로 인하여 후손이 번영하리라 했다고 한다.

조금 아래쪽에 종7대조(百祐)의 산소가 있고, 좀 더 아래로 내려오니 고조부의 산소가 있다. 앞으로 상남들이 훤히 보이고 아름들이 소나무가 둘러서 있는 모습이 과연 명당이다.

다들 좋은 자리에 계시지만 이 고조부의 산소도 참으로 시원하고 속이 탁트이는 곳이다.

바로 옆에 박사할아버지의 첩이라는 병갑,병철 족숙의 어머니 산소가 있었다.

그런데 내려오다 보니 길이 널리 닦여져 있고, 알려진 이야기는 너무 부풀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만하면 길이 좋은 편이다. 아래에서 고조부의 산소를 통하여 올라가면 8대조 할머니 산소까지 소로길이 있어서 쉽게 성묘를 할 수 있다. 앞으로 성묫길에 나서는 사람은 이 길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산리 뒷산이다. 이곳에는 6대조(良魯)가 계신다. 이 곳은 마을과 붙어 있어 성묘하기가 참 편하다. 그리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관이다. 병갑이 족숙이 자기 앞으로 등기를 옮겨 지금 소송이 붙어 있는 감나무 밭이 있다.

마지막 남아 있는 감 몇 개를 따서 먹었더니 그 맛이 일품이다. 옛날 밀양집에서 먹었던 그 맛이다. 3개나 먹었다.

이것으로 9개 선영의 성묘를 마쳤다. 진작 와서 성묘를 할 걸 그랬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경무와 같이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근정이도 며늘아이도 임신중이다.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살핌과 은덕으로 무사히 태어나고 그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으로 성장해서 세상의 기둥이 되었으면 한다.

매년 아이들을 데리고 성묘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