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정할아버지/오우선생실기

閭表碑文-閔遇洙 述幷書,金鎭商 篆,鄭存中 謹識

eungi5 2012. 1. 31. 12:48

 

 

 

閭表碑1

嶺南密陽之三郞江 有亭在其上 自亭稍北而東則有祠

盖鄕先生閔勗齋九齡, 敬齋九韶, 友于亭九淵, 無名堂九疇, 三梅堂九敍 五兄弟 湛樂之地 而 後人卽其地 立祠以俎豆之者也                     閭이문여(려),마을의 문,稍벼줄기끝초,점점, 작다.盖덮을개,숭상하다.

여표비문

영남의 밀양 삼랑강 가에 정자가 있고 정자에서 조금 북동쪽에 사당이 있다. 대개 향선생 민욱재 구령, 경재 구소, 우우정 구연, 무명당 구주, 삼매당 구서 다섯 형제가 즐겁게 지내던 곳인데, 후세 사람이 그곳에다 사당을 지어 향사를 한다.

 

高麗之末 有大提學閔公 諱 愉 見國政亂 退居童城以終 高風偉節 爲後世稱思

我朝吏曹參議 諱 謹 卽 其曾孫也                       偉훌륭할위,牧칠목,

고려 말기 대제학 민유란 분이 있었다 나라 정사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동성에 물러 가서 살았는데, 그의 고상한 풍도와 거룩한 절개는 후세의 일컫는 바이다. 아조의 이조참의였던 휘 근이 곧 그의 증손이다.

 

參議公之牧星州也 金江號叔滋 居於密陽 約與爲婚 公之子除 爲江湖之女婿 纔二年而歿 有遺腹子 熲 進士 有五丈夫子 皆賢 滋불을자,約묶을약,婿사위서,纔겨우재,

참의공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김 강호 숙자는 밀양에 살았는데 더불어 혼인하기를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아들 제가 강호의 사위가 되었으나 겨우 두 해만에 죽었다. 유복자로 경이 있어, 진사였고, 아들 다섯을 두어 모두 어질었다.

 

自幼遊於江湖子畢齋之門 以學行稱 親喪 哀與禮俱盡 兄弟友愛天至 旣同居一亭 扁以五友 作鶺鴒歌 相與和答 春秋 各携諸子若孫幾三十人 逍遙亭上 彌日2歡樂 携끌휴,彌두루미,

어릴 적부터 강호의 아들 점필재의 문하에서 배워서, 학행으로 칭찬 받았다. 어버이의 상사에 애곡과 예절을 아울러 다했고, 형제간에 우애는 타고난 것이었다. 한 정자에 함께 있으면서 오우라는 현판을 걸었고, 척령가를 지어 서로 화답하였다. 봄 가을에는 각각 여러 아들과 손자 거의 삼십여명을 데리고 정자 위를 거닐면서 여러 날을 즐거워하였다.

 

道臣任虎臣 過而見之 夜中 又猝至其處 見兄弟五人 同被而臥 深加敬嘆

乃聞于 朝 由此名動當世 搢紳士大夫來嶺南者 咸作詩以美之 眞一代盛事也 朝廷除官 不就而卒 嘉靖 癸亥3 鄕人爲建祠享之 猝갑자기졸,嘆탄식할탄,

도신(감사) 임호신이 방문해서 보았고, 또 밤중에 갑자기 그 곳에 가서 형제 다섯 사람이 한 이불 밑에 누웠음을 보고 매우 감탄하였다. 이에 그런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고, 이로 말미암아 명망이 그 세대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영남에 왔던 진신사대부가 다 시를 지어 찬미했는데, 참으로 한 시대 장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별세했으며 가정 계해년 고을 사람이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自是以來 爲邑宰者 必訪五友亭 想象興慕

或以五友出題以試士 盖好德所同也 公之子孫 頗蕃衍4而多居於密 今雖衰替5 大抵6篤於孝友 亦公之遺也

訪찾을방,頗자못파,蕃우거질번,衍넘칠연,替쇠퇴할체,抵거스를저,

이로부터 고을 원으로 온 자는 반드시 오우정을 방문하여 당시 광경을 상상, 감모하였고, 혹은 오우라는 제목으로 선비를 시험했는데, 대개 덕을 좋아함은 사람마다 같은 것이었다. 공은 자손이 번성하여 밀양에 많이 산다. 지금은 비록 쇠미하나 대개 효우에 독실함은 또한 공의 남긴 가르침이었다.

 

祠與亭 屢有興廢 而人士修治 碑不終壞獨 其遺文 散失不傳 吁可惜7

余嘗南遊 泛舟三浪之浦 謁三江祠 登五友亭 覽觀江山之勝 久而不能去 盖余亦大提學 後孫 與公爲同宗之親 而世敎衰 民不興行 如公者 不可得以復見也

屢창루(누),吁탄식할우,惜아낄석,泛뜰범,浦개포,覽볼람,提끌제,

사당과 정자가 여러 차례 흥폐하여 인사들이 중수했으나 비만은 끝까지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유문은 없어져서 전해 오지않으니 아아, 애석하여라.

내가 일찍이 남방에 갔다가 삼랑포에 배를 대고, 삼강사를 뵙고 오우정에도 올랐다. 강과 산의 훌륭한 겅치를 두루 보고 두리번거리면서 감개가 깊어, 오래도록 능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대개 나도 대제학의 후손으로서 공과 같은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 교화가 쇠퇴하니 백성이 행실을 닦지 않아 공과 같은 이를 다시는 볼 수가 없다.

 

公之六代孫友賜8 七代孫涵洙9, 光洙10 等 以亭畔舊有記事碑 毁於壬辰兵燹 今將改樹 請余題其石以示後 余辭不獲 畧書如此云

崇禎甲申後百十年癸酉11八月 日

嘉善大夫原任司憲府大司憲 閔遇洙12 述幷書

資憲大夫知敦寧府事兼同知成均館事 金鎭商13

賜줄사,涵젖을함,畔두둑반,毁헐훼,畧다스릴약(략)略과 같은자

,禎상서정,복,행복,府곳집부,司맡을사,商헤아릴상,

공의 육대손 우사와 칠대손 함수, 광수 등이 예전에 있던 기사비가 임진년에 왜놈 병화에 허물어졌으므로 이번에 다시 세울 참이라 하며, 나에게 그 돌에 글을 적어서 후인에게 보이기를 청했다. 내가 사양해도 되지 않기에 대략 이와 같이 적었다.

숭정 갑신년 후 백십년(1753) 8월 일

가선대부 원임 사헌부 대사헌 민우수가 글을 짓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자헌대부 지돈령부사 겸 동지성균관사 김진상 전서하다.

 

碑之竪亭於江岸 舊也 碑沒幾百年 文成蟾樂翁 又幾十年 余適來莅此土 謀於五友諸孫 略鳩財力 登刊伐寘之石 移竪祠庭 盖祠宇旣成之後體段重於遺亭故也 玆因士林之請 謹識改樹

通訓大夫行密陽都護府使 鄭存中 謹識(英廟乙未14)

岸언덕안,沒가라앉을몰,蟾두꺼비섬,달빛.適갈적,莅임할리,다다름,

謀꾀할모,鳩비둘기구,刊책펴낼간,寘둘치,놓아둠,段구분단,

정자가 있는 강 언덕에 세웠던 예전 비가 넘어진 지 거의 백년이나 되었는데, 글은 섬락옹이 지은 것이었다, 또 몇 십년을 지나서 내가 이 지방 원으로 왔다. 오우정 여러 자손과 의논하고 재물을 약간 모아 곧 다듬어 준 돌에다 새겨서 사당 뜰에다 옮겨 세웠다. 대개 사당이 이미 낙성된 후에는 사체가 정자보다 소중함이 사당 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림의 청에 따라 고쳐 세운 연유를 삼가 기록하였다.

통훈대부 행 밀양도호부사 정존중(영묘 을미년-1775)

 

  1. 여표비: 뛰어난 분의 행적을 새겨 마을 앞에 세운 비. [본문으로]
  2. 미일: 날을 거듭하다, 종일, 온종일 걸리다 [본문으로]
  3. 가정 계해: 명종조 1563년 [본문으로]
  4. 번연: 한창 성하게 일어나 퍼짐, 늘어나 퍼지다 [본문으로]
  5. 쇠체: 쇠패하다, 쇠약해지다, 쇠미해지다 [본문으로]
  6. 대저: 대체로 보아서. [본문으로]
  7. 가석: 섭섭하다, 아쉽다, 애석하다 [본문으로]
  8. 友賜 :友于亭-裕-應湛-仁復-孝曾-軫-友賜 [본문으로]
  9. 涵洙: 九淵-裕-應湛-仁復-孝曾-輯-友華-涵洙 [본문으로]
  10. 光洙:友于亭-裕-應湛-仁復-孝先-輶-友參-光洙(觀洙의 아우님) [본문으로]
  11. 계유: 1753년 [본문으로]
  12. 閔遇洙:본관은 여흥. 자는 사원(士元), 호는 섬촌(蟾村)·정암(貞庵)이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의 손자이고, 문충공(文忠公) 진후(鎭厚)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로 현감 이덕로(李德老)의 딸이다.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종2품)을 거쳐 성균관좨주·세자찬선(世子贊善)·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충렬서원의 제 28대 원장을 지냈다. [본문으로]
  13. 金鎭商: 1684년(숙종 10)∼1755년(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 할아버지는 참판김익훈(金益勳), 아버지는 김만채(金萬埰)이다.1735년 부제학, 1738년 대사성, 1740년 대사헌을 거쳐 1753년 좌참찬(정2품)에까지 이르렀다. [본문으로]
  14. 을미: 1775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