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정할아버지/오우선생실기

友于亭先生墓碣銘- 宋曾憲 撰 ,尹用求書

eungi5 2012. 1. 29. 17:56

 

友于亭先生墓碣銘1 並序

聖人有言 曰 魯無君子 斯焉取斯 余於友于亭先生閔公益驗之矣

公以金江湖之彌甥2 兄弟五人 俱授業于江湖之子佔畢齋先生 得聞爲學大方 又從3456諸先生 爲同門道義交 而及其遘禍 迹雖殊而志則同

碣비갈,魯노둔할노,驗증험할험,彌두루미,甥생질생,외손자,俱함께구,蠹좀두,濯씻을탁,遘만날구,

 

우우정선생 묘갈명 서문 아울러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어찌 여기에서 이런 학행을 배웠겠는가?’ 했는데 내가 우우정 선생 민공한테서 더욱 징험하였다.

공은 김강호 집 외손이다. 형제 다섯사람이 강호의 아들 점필재 선생에게 함께 배워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다. 또 한훤당, 일두, 매계, 탁영 등 여러 선생을 따라 같은 문하에 도의로 사귀는 벗이 되었다. 그런데 그 분들이 화변을 당했는데, 자취는 비록 달랐으나 뜻한 바는 같았다.

 

噫 百世之下 孰不聞風而立懦哉

謹按 公 諱 九淵 字 深遠 系出驪興 高麗尙衣奉御 諱 稱道 爲鼻祖 自是奕葉7相承 至大提學 諱 見季世8政亂 晦跡9以沒身 卽杜門洞10之一賢也 以文章節義 著稱焉

噫탄식할희,懦나약할나.按누를안,系이를계,驪가라말여,御어거할어,

奕클혁,愉즐거울유,晦그믐회,沒가라앉을몰,著분명할저,

백대후에라도 누구인들 선생의 고상한 풍치를 들으면 나약하던 사람이 굳이 세어지지 않으랴.

삼가 살피건데 공의 휘는 구연이요 자는 심원인데 계통이 여흥에서 나왔다. 고려 때 상의봉어 벼슬에 있던 휘 칭도가 시조이다. 이로부터 여러 대가 서로 이어져서 대제학 휘 유가 고려말기의 어지러운 정사를 보고 자취를 숨겨 생을 마쳤다. 즉 두문동의 한 현인이었고(72인 중 1인), 문장과 절의로서 높게 칭송받았다.

 

一傳而入本朝 吏曹判書 諱 壽生 是生 觀察使 諱 若孫 是 出 吏曹參議11 於公爲曾祖以上也

한 대를 전해 본조에 들어와서 이조판서 휘 수생이 관찰사 휘 약손을 낳았다. 관찰사는 이조참의 휘 근을 낳았으니 공의 증조 이상의 어른이다.

 

祖通德郞12 委禽于江湖之門 而早世 考 進士 諱 妣慶州李氏縣監枔女 寔生五男

조부는 통덕랑 휘 제이고, 강호 집에 장가들었으나 일찍 별세했다. 고는 진사 휘 경이고 비는 경주 이씨 현감 심의 따님이다. 이 어른이 아들 다섯을 두었다.

 

長曰 九齡 號勗齋 仲曰 九韶 敬齋 第三卽公也 第四曰 九疇 號無名堂 季曰九敍號三梅堂 俱有至性 天資近道 進士公敎之嚴 自幼不慢遊

委맡길위,禽날짐승금,妣죽은어미비,寔이식,참으로,

맏의 이름은 구령, 호는 욱재이고, 둘째는 구소, 호가 경재이고, 셋째가 즉 공이다. 넷째 구주의 호는 무명당이고 막내 구서의 호는 삼매당이다. 아울러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웠다. 진사공의 가르침이 엄격하여 어릴 때부터 실없이 노닥거리지 못했다.

 

及登師門 薰陶13成就 而事父母 誠孝篤至及 丁憂14哀戚15甚處 兄弟友愛近天 食卓寢被 必與之同 嘗構一亭於三江之上 而扁以五友 塤唱篪和 以敍湛樂之情 又作鶺鴒歌一章 以寓急難之義                                 薰향풀훈,戚겨레척,處살처,

그후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아서 학업을 성취하였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효도가 돈독했는데 상을 당하자 슬픔이 지극하였다. 형제간 우애는 천성이어서 밥 먹을 때 식탁을 함께하고 잠잘 때 이불을 반드시 같이하였다. 일찍 삼랑강가에다 정자 하나를 지어 오우라는 현판을 걸고 훈을 불면 지로 화답하여 즐거움을 한껏 펼쳤다. 또 척령가 한 가락을 지어 형제간에 급란을 서로 구원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時當 戊甲之間士禍16大作 畢門群賢 爲1718輩搆誣 網打殆盡 惟公五昆季 絶意世路 放迹湖山 危言激論 不發於口 而超然 自脫於株累19之禍 其見幾守道之精 有如是夫 道臣任虎臣20 見公行誼 大加敬服 遂聞于 朝 各除一命 而褒之 皆不就 由是名動一世 搢紳士夫21之遊嶠南22者 咸有韻語 以贊之 眞一代盛事也

寓머무를우,墩돈대돈,搆이해못할구,誣무고할무,殆위태할태,

激물결부딪쳐흐를격,褒기릴포,嶠뾰족히높을교,贊도울찬,

당시 무오, 갑자년 사이에 사화가 크게 일어나서 점필재 문하 여러 현인이 유자광, 이극돈 등의 모함을 받아 거의 다 옭혀 들었다. 오직 공의 다섯 형제는 세상 일에 뜻을 끊고 호수와 산에 자취를 감추어 위태로운 말과 과격한 언론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루되는 화변을 저절로 벗어났으니 그 기미를 보고 도를 지킨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

도신 임호신이 공의 행의를 보고 크게 감복하였다. 드디어 조정에 보고하여 각 일명을 제수하여 포장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명망이 온 세상에 알려졌고 진시 사대부로써 교남에 온 자는 모두 찬미하는 운시가 있었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장한 일이었다.

 

嘉靖癸亥23 鄕人 建廟竪碑于亭之傍 而俎豆24之 不幸 龍蛇兵燹25 亭若廟若碑 俱爲鞠茂 且其文獻荐經鬱攸之災 而不傳焉 可勝惜哉

靖편안할정,傍곁방,燹들불선,鞠공국,且또차,荐거듭할천,攸바유,

가정 계해년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정자 옆에는 비를 세워 향사하였다. 그 후 불행하게 임진, 정유 왜란에 정자와 사당과 비석이 모두 풀반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문헌도 화재를 겹쳐 당해서 전해오지 않으니 애석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孝廟庚寅26 知府27崔煜 登亭址感慨 以訪五友亭有感出題 於是士論峻發 肅廟乙亥 就舊址重建之 諸儀畢擧 寒水齋權先生28 手書其祠曰 三江 堂曰 象友 貞庵閔文簡29 撰碑文 其它30名公巨擘31 序跋之 歌詠之者 甚盛 足以 不朽於後也                                                                                         惜아낄석,峻높을준,肅엄숙할숙,簡대쪽간,它다를타,뱀사,

擘엄지손가락벽,가르다,쪼개다,跋밟을발,詠읊을영,朽썩을후,

효묘 경인년에 지부(부사) 최욱이 정자터에 왔다 감개하여 ‘오우정을 탐방하고 느낌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백일장 시험을 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선비들의 공론이 크게 나왔다. 숙종 을해년에 옛터에 건물을 다시 지어 모든 의식을 다 거행하게 되었다.

한수재 권선생이 사당에 ‘삼강’, 강당에는 ‘상우’라는 현판을 손수 썼고, 정암 민문간공이 비문을 지었다. 이밖에도 문장으로 유명한 분들이 서문과 발문을 지었고, 시가를 지은 것도 매우 많아서 후세에 영원이 전하기에 이르렀다.

 

墓在密陽郡下南坊西田枕辛原 而生卒年月 譜不載焉云 配 慶山全氏瑞卿女 葬用魯禮32 育四男 封事 禧祜禑 封事男 應湛 餘不盡錄

坊동네방,枕베개침,譜계보보,족보,瑞상서서,卿벼슬경,裕넉넉할유,禧복희,祜복호,錄기록할록,

묘는 밀양군 하남면 서전 신좌에 있고 생년과 졸년은 보첩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배위는 경산 전씨 서경의 따님이며, 상사에는 노나라의 예법을 따랐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는 봉사이고, 다음은 희, 호, 우이다. 봉사의 아들은 응담이며, 나머지는 모두 기록이 없다.

 

嗚呼 先生以學邃行篤 存而爲當世之所矜式 歿而爲後學之所誦慕 其視世之名位 雖赫赫 而終至湮沒33無稱者 果何如哉

邃깊을수,깊숙함.矜불쌍히여길긍,歿죽을몰,誦욀송,赫붉을혁,湮잠길인,빠질인,沒가라앉을몰,

아아, 선생은 깊은 학문과 독실한 행검으로써 살아서는 당세의 모범이 되었고, 사후에는 후학들의 앙모하는 바가 되었다. 생전의 명망과 지위는 비록 혁혁했으나 사후에는 그냥 사그러지고 일컫는 자가 없는 것과 비교하면 과연 어떠할까.

 

今公後孫昌植 晶植 以其門內 諸長老命袖家狀 遠來謁余以碑銘 余辭匪其人而不獲 遂忘拙陋 書之如此 使後之來讀者 知其爲友于亭先生 衣履34之藏歟

昌창성할창,袖소매수,狀형상장,모양,謁아뢸알,銘새길명,匪대상자비,부정의 뜻,

獲얻을획,拙졸할졸,陋좁을루,歟어조사여,

이번에 공의 후손 창식과 정식이 그 문중 여러 어른의 명으로 가장을 가지고 멀리와서 나에게 비명을 청한다. 나는 그 비명을 지을만한 사람이 아니므로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드디어 무디고 비루함을 잊고 이와 같이 적어 이후에 여기 와서 이 비문을 읽는 자에게 여기가 우우정 선생의 의리를 갈무리한 묘임을 알게 하였다.

 

銘曰 克承世家 閥閱35之後 蚤遊大賢 門墻36之域 卓乎孝友 德行之徽 允矣學問 淵源37之的 我撮其大 以銘其謁 永諗來世 庶幾弗泐

閥공훈벌,閱검열할열,蚤벼룩조,일찍,墻담장,徽아름다울휘,允진실로윤,撮취할촬,諗고할심,泐돌갈라질륵,글씨쓰다.

명에 적기를

세가를 능히 이어서 큰 문벌의 후손이었다.

일찍부터 대형에게 배워 문장 지경에 들었다.

우뚝했던 효도와 우애, 아른다운 덕행이었고

진실했던 학문은 연원이 적실하였다.

나는 그 중에서 큰 것만 모아 그 비석에 명문하여

길이 내세에 알리노니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으리.

 

著雍執徐38天中節39 德殷 宋曾憲40 撰                               雍누그러질옹,

崇祿大夫前判敦寧院事 海平 尹用求41

戊辰42十月 日立

저옹 집서 천중절에 덕은 송증헌 지음

숭록대부 전 판돈령원사 해평 윤용구 씀

무진 시월 일에 세움

  1. 묘갈명: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에 새기는 글 [본문으로]
  2. 미생: 누이의 손자. 외손 [본문으로]
  3. 한: 한훤당 김굉필의 호, 점필재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통달했고 육경을 깊이 연구했다. 문하에 조광조, 김안국, 등 큰 학자가 나왔다. 갑자사화에 죽음을 당했고, 그 후 문며에 배향되었다. [본문으로]
  4. 일두: 점필재의 문인 정여창의 호, 성리학의 대가로 경서에 통달했고, 용학주소 등 저서가 있었으나 夫人이 불살라 버렸다. 무오사화에 종성으로 귀양갔고, 갑자사화에 부관참시를 당했다. 문묘에 배향됨. [본문으로]
  5. 매계: 매계 조위의 호, 성리학의 대가이며 점필재의 문인, 무오사화에 의주에 장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황간, 김산의 서원에서 제향됨. [본문으로]
  6. 탁영: 탁영 김일손의 호, 점필재의 문인, 스승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다가 이로 인해 무오사화가 일어나 많은 신진사류가 죽임을 당함. [본문으로]
  7. 혁엽: 여러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림 [본문으로]
  8. 계세: 세기말, 말기, 말세 [본문으로]
  9. 회적: 자취를 감추다, 은거하다 [본문으로]
  10. 두문동: 경기도 개풍군 관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골 이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의 신하 72인이 개성의 동남쪽 고개에 조복을 벗어 두고 이 골짜기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숨었는데 나오게 하려고 마을에 불을 질렀으나 모두 타 죽고 나오지 않음. [본문으로]
  11. 이조참의: 조선 시대, 이조에 속한 정삼품의 당상관 벼슬, 이조 참판의 아래이다   [본문으로]
  12. 통덕랑: 조선시대 문산계(文散階) 가운데 하나. 정5품 상계이다 [본문으로]
  13. 훈도: 흙을 다져 질그릇을 굽고 만든다는 뜻으로,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잘 가르치고 길러서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함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14. 정우: 어버이의 상사(喪事)를 당함. [본문으로]
  15. 애척: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함,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다 [본문으로]
  16. 갑자무오사화: 무오(1498),갑자(1504)사화 [본문으로]
  17. 유자광: 부윤, 유규의 서자인데 건춘문 갑사로 있으면서 남이, 강순 등이 모반을 했다고 무고해서 숙청하고 그 공으로 무령군으로 봉해졌다. 일찍이 함양군에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으로 건 일이 있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서 떼어 버렸는데 자광은 이에 한을 품고 이 극돈과 함께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 대간의 탄행으로 귀양가 죽었다. [본문으로]
  18. 이극돈: 연산군 때 사람. 형조참판을 거쳐 좌리공신으로 광원군으로 봉해졌다. 성종실록을 편수할 때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비방한 것이라고 참소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죽은 후에 관직과 시호를 추탈했다. [본문으로]
  19. 주루: 연루하다, 끌려 들어가다, 연좌하다 [본문으로]
  20. 임호신: 1547년 경상도관찰사 [본문으로]
  21. 진신: 진신, 벼슬아치의 총칭, 관리 또는 퇴관한 사람 [본문으로]
  22. 교남: 조령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23. 계해: 1563년 嘉靖癸亥 [본문으로]
  24. 조두: 제사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의 하나. 제사를 지냄 [본문으로]
  25. 용사병선: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을 이름 [본문으로]
  26. 효묘 경인: 1650년 [본문으로]
  27. 지부: 밀양부사의 뜻 [본문으로]
  28. 한수재 권상하: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안동. 서울 출생. 자 치도(致道). 호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시호 문순(文純). 1660년(현종 1) 19세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본문으로]
  29. 문간공: 정암 민우수의 시호가 文簡이었음. [본문으로]
  30. 기타: 기타. 그 밖에. 그 외에. [본문으로]
  31. 거벽: 1.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본문으로]
  32. 노예: 노나라의 예의 [본문으로]
  33. 인몰: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 [본문으로]
  34. 인몰: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 [본문으로]
  35. 벌렬: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음. 또는 그런 집안. [본문으로]
  36. 문장: 지경 문장을 지나서 당에 들어 가게 되면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인데 문장에 오르기만 해도 크게 어진 사람인 것임. [본문으로]
  37. 연원: 근원과 같음 [본문으로]
  38. 저옹집서: 저옹은 옛 갑자의 무, 집서는 옛 갑자의 진, 즉 무진의 별칭. 여기서는 1928년 [본문으로]
  39. 천중절: 음력 5월 5일, 즉 단오날 [본문으로]
  40. 송증헌: 문장이 뛰어나 경향각지에 많은 글을 남김 [본문으로]
  41. 윤용구: 1853년(철종 4)∼1939년. 문신·서화가.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다.1871년(고종 8) 직장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 대신에 십수회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誤)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본문으로]
  42. 무진년: 1928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