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신(任虎臣)
慶尙道 觀察使 任虎臣이 오우선생의 所聞을 듣고 事實 與否를 確認코자 밤중에 그 寢所를 갑자기 찾아가니 果然 共被同寢하는지라 이를 目覯하고 크게 驚歎하여 그 자리에서 ‘五友亭’이라는 大懸板을 手書하고 亭贊四韻을 지어 致賀한 다음 돌아가서 朝廷에 그 事實을 報告하니 朝廷에서도 五兄弟에게 各各 官職을 除授함.(明宗 2년, 1547년) |
1506년(중종 1)∼1556년(명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무백(武伯).
판서임유겸(任由謙)의 손자로, 호조참판임추(任樞)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 유생전강(儒生殿講)때 《대학》으로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 1533년에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동지사인 아버지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서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에 의하여 황간현감으로 쫓겨났다.
1538년 사간원헌납, 시강원필선을 거쳐 1541년 의정부검상, 이듬해 충청도진휼경차관으로
나가 가흥창(可興倉)·아산창(牙山倉)의 곡식으로 기민을 진휼하도록 하는 한편, 수령·방백을
문책하였다.
1543년 도원수이기(李芑)의 종사관(從事官), 사간, 황해도재상어사로 나가 지방관의 탐학상을
지적, 견책하도록 하였다. 1544년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어 군자감정(軍資監正)·홍문관직제학, 1545년(명종 즉위)에 우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고,
1546년에 우승지·도승지·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4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서는 정미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50년 동지중추부사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고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1552년 경연특진관, 이듬해 한성부좌윤, 1554년 우윤을 거쳐 155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1556년 호조판서에 기용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사직하고 지돈령부사로 죽었다.
청정(淸淨)하고 신중함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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