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바쁘신 시간에도 불구하고, 경향(京鄕)의 원근(遠近)에서 감당하기 벅찬
조문과 위로를 보내주신데 대하여 어떠한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식들도 예측하지 못한 갑작스런 별세로 두서없이 장례를 치루다 보니 예(禮)를 갖추어 인사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고인(故人)께서는 벼슬이나 재물을 모으시지는 못하셨지만 자식들에게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우리 집안의 자랑인 오우선생의 우애를 기리는 <삼강서원(三江書院)>의 복향(複享)을 주도하셨고, 그 할아버님의 行狀과 文集인 <오우실기(五友實記)>를 간행하셨으며, 후손이 없는 방조(傍祖)의 산소를 실묘(失墓)하지 않도록 한 군데로 이장(移葬)하여 성역화하는 등 선조에 대한 책무를 다하셨습니다. 가훈(家訓)을 여천동락(與天同樂)이라 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를 강조하셨고, 덕성(德性)을 기르는데 게을리 하지 않도록 훈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살만하면 그 다음은 아끼지 말고 남을 위해 쓰기를 권하였습니다. <우애는 효도의 꽃><형우제공(兄友弟恭)>을 강조하시며, 부모에게 잘하기 보다는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고, 집안의 전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당호를 <오화당(五和堂)>이라 이름 하여 우리 6남매의 화합을 경계(警戒)하셨습니다.
23년 전 還甲年, 뇌경색으로 오른쪽 반신을 못 쓰시게 되었지만 투병의 집념은 우리 후손들에게 큰 교훈이었습니다. 처음 몇 년은 건강 회복에 온 힘을 쏟으셨지만 여의치 않음을 아신 후 오히려 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터득하셨습니다. 왼손으로 서예를 연마하시어 서예전(書藝展)에도 출품하시고, 그 중 몇 작품을 모아 고희전(古稀展)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오랜 투병기간 동안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위의 도움을 사양하셨으며, 품위를 잃지 않고, 선비의 삶을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도, 모자란 근력(筋力)을 추스려 몸을 정결하게 하고, 힘겹지만 당신 손수 의복을 정제하셨습니다. 큰 고통 없이 편안히 세상을 하직하신 것은 평소 마음을 잘 다스린 결과로 생각하며 자식들도 본 받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간 가문의 상례(喪禮)는 유가(儒家)의 법도에 따라 매장하였으나, 고인(故人)은 예속(禮俗)의 변혁에 순응하여 문중(門中)에서는 처음으로 화장(火葬) 후 납골하기를 유언(遺言)하셨습니다. 그 뜻을 받들어, 비가 오리라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아주 쾌청한 봄날씨에, 경기도 양수리에 새로 마련한 가족묘원에 무사히 모셨습니다.
매번 저희 가족의 대소사(大小事)에 빠뜨리지 않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저희들이 사람 도리(道理)를 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2006.3 29)
喪主 : 閔雲基, 垠基, 從基, 淨基, 敬基, 棟基 함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