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한학관련

사성,십철,육현,십팔현,동방오현

eungi5 2011. 1. 29. 12:32

*사성(四聖) : 공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십철(十哲) (공자의 열사람의 제자) :

1. 안회(顔回):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인.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였다.

                    은군자적인 성격으로 “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켰다.

2. 민자건(閔子騫): 중국 노나라 때의 현인, 이름은 손이며 자건은 자이다. 효자 유명하다

3. 염백우(冉伯牛): 중국 춘추 시대유학자. 이름(). 백우. 공문십철 사람으로,

                    덕행선비알려졌다.

4. 중궁(仲弓):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 자는 중궁이다

5. 재아(宰我):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 본명은 재여(再予). 자는 자아(子我).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언어에 뛰어났다. 제나라의 임묘대부(臨苗大夫)가 되었다.

6. 자공(子貢): 중국 춘추 시대 위나라유학자(?B.C.520~?B.C.456). 성은 단목(), 이름().

                    공문십철()의 사람으로 언어뛰어났으며, 노나라 위나라

                    재상()을 지냈다.

7. 염유(冉有): 중국 춘추 시대의 노나라 사람(?~?). 자는 자유(子有). 염유(冉有)라고도 한다.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정사(政事)에 뛰어났다.

8. 자로(子路):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B.C.543~B.C.480). 성은 중(). 이름(). 로는 .

                     공자제자십철()의 사람으로 정사()에 뛰어났으며 공자제일

                     섬겼다고 한다.

9. 자유(子游): 중국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유학자(B.C.506~?B.C.445). 본명은 언언(言偃). 공문십철

                    (孔門十哲)의 한 사람으로, 자하(子夏)와 더불어 문학에 뛰어났고 예(禮)의 사상이 투철하였다.

10. 자하(子夏): 중국 춘추 시대유학자(B.C.507~?B.C.420). 본명복상(). 공자제자로서 십철

                     ()의 사람이다. 위나라 문후()의 스승으로 ()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예의 객관적 형식존중하였다.

 

*육현(六賢) :  

1. 염계선생(濂溪先生) 주돈이(周敦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세계는 태극->음양->오행->남녀->만물의 순서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또,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하였다.

                            자 무숙(). 호 염계(). 도주(: )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 기슭의 염계서당()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왕안석()과 동시대의 인물

                            이다. 그는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

                            의 근원인 태극(:)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하여 ‘태극도(

                            )’를 그리고 태극→음양()의 이기()→오행(:·· ··)→

                            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

                            문에, 중정() 인의()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저서에는 《태극도설()》 《통서()》가 있으며, 수필 《애련설()》에

                           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었다. 남송의 주자()는 염계가 정호()·정이(頤) 형

                           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출처] 주돈이 [周敦頤 ] | 네이버 백과사전
 

2. 명도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

                           자 백순(). 호 명도(). 시호 순(). 허난성[] 뤄양[] 출생. 존칭으로 명

                          도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頤:)와 함께 이정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

                          ()이 남안(:西 )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頤:)를 한번 보고 아

                          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西] 후셴현

                          [鄠]의 주부(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西) 진청현[

                          ]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

                          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이

                          되었으나, 왕안석()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

                          이 즉위하고 사마광()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

                          기 전에 병사하였다.        [출처] 정호 [程顥 ] | 네이버 백과사전

 

3. 이천선생(伊川先生) 정이(程頤),

                          자 정숙(). 호 이천(). 시호 정공(). 허난성[] 뤄양[] 출생. 이천백

                          ()에 봉하여졌으므로 이천 선생이라 존칭된다. 형 정호(:)와 함께 주돈이

                          (頤:)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라 불리며 정주학()의 창

                          시자로 알려졌다. 철종() 초에 사마광()·여공저()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숭정전설서(殿)로 발탁되었다. 그

                          러나 왕안석()·소식() 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당화()를 입어 쓰촨성[

                          省] 푸저우[涪]로 귀양간 일도 있다.

                          학자로서의 그는 《역경()》에 대한 연구가 특히 깊었고, ‘이기이원론()’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지미(:)한 것은 이(:)요 지

                          저(:)한 것은 상(:·)이라 하여 일단 양자를 구별하고, 체()와 용()은 근원이

                          같으며 현()과 미()에 사이가 없다”고 상관관계를 설명한 점에 특색이 있다. 그의 철학

                          은 주자()에게 계승되어, 《태극도설()》과 《태극도설해()》에

                          나타나 있다.

                          학문의 방법도 형은 오직 정좌()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경()’을 중히 여겨 ‘거경궁리

                          ()’에 힘썼다. 이와 같은 일도 주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송대()의 신유학

                          인 정주학의 주축이 되었다. 저서에 《역전()》 4권이 있으며, 그의 학설은 형의 학설

                          과 함께 서필달()의 《이정전서()》에 수록되었다. 또 그의 전기는 주자가

                          지은 《이락연원록()》에 실려 있다.  [출처] 정이 [程頤 ] | 네이버 백과사전

 

 

4. 회암선생(晦庵先生) 주희(朱熹),

                      주희(朱熹, 1130~1200)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성

                         (姓)은 주(朱), 휘(諱)는 희(熹)이며, 자(字)는 원회(元晦) · 중회(仲晦)이다. 그리고, 호(号)는

                         회암(晦庵) · 회옹(晦翁) · 운곡노인(雲谷老人) · 창주병수(滄洲病叟) · 둔옹(遯翁)이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

                        서 맹자 · 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 정호 · 정이 등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

                        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

                        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

                        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잡는

                        다.

5. 강절선생(康節先生) 소옹(邵雍),

                        호 안락선생(). 자 요부(). 시호 강절(). 소강절()이라 불릴 때도 많

                        다. 허난[]에서 살았으며, 주염계()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로부터

                        도서 ·천문() ·역수()를 배워 인종()의 가우연간(:1056∼1063)에는 장

                        작감주부(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 등의 구법당()과 친교하면서 시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의 주자()는 주염계, 정명도(), 정이천()과 함께 강절을 도학(

                        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을 만들었다. 즉, 역()이 음과 양의 2원()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 ·양() ·강() ·유()의 4원(

                        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2치논리()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

                        )》 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

                        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 2편에서 허심(), 내성()의 도덕수양법

                        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의 시집() 《이천격양집()》(20권)

                        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출처] 소옹 [邵雍 ] | 네이버 백과사전

6. 횡거선생(張橫渠先生) 장재(張載)

                    장재(張載: 1020~1077)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봉상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었기 때문에 횡거 선생(橫渠先生)

                       이라고 호칭된다. 존칭하여 장자(張子)라고 불린다. 어렸을 때에 현의 지사직(知事職)으로

                       있던 부친을 잃었다. 젊었을 때 범중엄을 회견하고 병사(兵事)에 대해 말하였다. 그때 범중

                       엄은 "유자(儒者)에게는 자연히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를 즐길 만한 것이 있

                       다. 어찌하여 병담(兵談) 같은 것을 좋아하는가"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그에게 주었

                       다. 횡거는 거기서 비로소 (道)를 구할 것을 결심하고 한때 불교 · 노장사상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6경(六經)의 학문으로 돌아왔다.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에 지방관으로서 여러 가

                       지 공적을 쌓았다. 그때의 황제인 북송신종은 그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의

                       (執政: 내각의 최고 책임자)이었던 왕안석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신병을 이유로 향리에 돌

                       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을 다하였다.

 

 

*십팔현(十八賢)

1.설 총(경주설씨) 우당-           신라 고승 元曉의 子로 神文王 때 翰林으로 弘儒侯로 追封

2.최치원(경주최씨) 고운-         신라 때 唐나라로 가 修學하고 돌아와 翰林學士로 시호는 文昌侯

3.안 유(순흥안씨) 회헌-           고려 忠烈王 때 修文館太學士로 시호는 文成公

4.정몽주(연일정씨) 포은-         고려 恭愍王 때 관이 門下侍中으로 시호는 文忠公

5.김굉필(서흥김씨) 한훤당-      刑曹佐郞이었고 조선 中宗 때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6.정여창(하동정씨) 一두-         縣監이었고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獻公

7.조광조(한양조씨) 정암-         大司憲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8.이언적(여주이씨) 회재-         左贊成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元公

9.이 황(진성이씨) 퇴계-           大提學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純公

10.김인후(울산김씨) 하서-       弘文館校理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11.이 이(덕수이씨) 율곡 -        吏曹判書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成公

12.성 혼(창녕성씨) 우계-         左參贊이었고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簡公

13.김장생(광산김씨) 사계-       刑曹參判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元公

14.조 헌(백천조씨) 중봉-         僉正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15.김 집(광산김씨) 신독재-      判中樞府事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16.송시열(은진송씨) 尤菴-       左議政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17.송준길(은진송씨) 동춘당-    吏曹判書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18.박세채(반남박씨) 현석-       左議政이었고 시호는 文純公

 

 

 

 

 

 

동방오현(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이 문묘에 종향되었다.

 

1. 한훤당 김굉필 寒暄堂 金宏弼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朝鮮前期)의 문신.성리학자(文臣. 性理學者)로서 자는 대유(大猶),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蓑翁). 관향은 서흥(瑞興).

               단종(端宗)2년 한경 정릉 사제(漢京 貞陵洞 私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로서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소시에는 호방(豪放) 불기(不羈)하였으나 성장하면서 발분(發奮) 역학(力學)하였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문(金宗直門)에서 수업(受業)하면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자칭 소학동자

               (小學童子)라 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깨달았다고 한다.

               평생토록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여 삼십을 넘어서 경학(經學)을 섭렵(涉獵)하고 사마시(司馬

               試)에 합격하였다.

               성종 25년에 행의(行義)로써 천거(薦擧)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고, 연산군(燕山君) 2

               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다음해 형조좌랑(刑曺佐郞), 동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남에 전사관(前史官) 탁영(濯瓔) 김일손(金馹孫), 소유(小游) 권오복(權五福) 등은 사사(賜死)

               되고 이미 파계(他界)한 점필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한훤당(寒暄堂)도 점필재(점畢齋)의 문인으로 붕당(朋黨)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

               川)에 원방부처(遠方付處)로 유찬(流竄)되었다. 한훤당은 희천에 이르러서도 평시와 다름없이 학

               문연구와 후진강학(後進講學)에 전염(專念)하였다.

               때마침 정암(靜庵)이 부친의 임소(任所)를 따라 어천(魚川)에 오게 되어 한훤당(寒暄堂)에게 수학

               하게 되니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정맥인 한훤당(寒暄堂)의 학문이 정암(靜庵)에게 전해졌다.

               2년 뒤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고,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유적사사(留謫賜死)

               되었다.

               그후 신원(伸寃)되어 중종 12년(1517)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고, 선조 10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광해군 2년에 일두(一두)·정암(靜庵)·회재(晦齋)·퇴계 (退溪)와 함께 문묘(文

               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서는 경현록. 한훤당집. 가범(家範). 등이 있다.

 

2. 일두 정여창 一蠹 鄭汝昌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자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一두). 관향은 하동(河東).

               세종32년 함양 덕곡리 개평(咸陽 德谷里 介坪)에서 태어났다.

               함길도(咸吉道) 병마우후(兵馬虞候) 증 한성 좌부윤(贈漢城左府尹) 육을( 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이고 학업에 전념하여 한훤당(寒暄堂)과 함께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

               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했으며, 경전(經典)을 공부하여 성리학(性理學)의 깊은 이치(理致)를 깨우

               쳐 역행천이(力行踐履)하여 명경독행(明經篤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

               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뒤에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옮겨져서 동궁(東宮)을 보도하였으나 질시(嫉視)를 받아 안음(安陰)현감으로 외임(外

               任)되자 향리(鄕里)의 자제(子弟)들을 훈도하여 많은 제자를 키웠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連坐)되어 경성으로 원찬(遠竄)되어 적소(謫所)에서

                1504년 타계(他界)하였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중종 12년(1517) 정 포은(鄭圃隱)·김 한훤당(金寒暄堂)과 같이 동국(東國) 도학(道學)의 종(宗)으

               로 숭상(崇尙)되어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고, 뒤에 문헌(文獻)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문

               묘(文廟)에도 승무(陞무)되었다.

               저서(著書)로 용학주소(庸學註疏)가 있었으나 사화(士禍) 때 불타 없어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찬(撰)한 문헌공 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한다.

 

 

3. 정암 조광조 靜庵 趙光祖 

               자 효직(孝直), 호 정암(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朝鮮) 중기의 문신 거유(文臣 巨儒)로

               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관향은 한양(漢陽).

               개국공신(開國功臣) 온(溫)의 5세손으로 성종13년 한성부(漢成府)에서 태어났다.

               일직부터 학문에 뜻이 커서 과거(科擧)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18세때 부친 원강(元綱)이 어천(魚川)찰방(察訪)으로 부임되었을 때 마침 한훤당 (寒暄堂 )이 희천

               (熙川)에 유찬(流竄)되어 있었기에 정암(靜庵)은 한훤당(寒暄堂)에게 종학(從學)하여 위학(爲學)의

                대방(大方)을 들었다.

                그의 학문(學問)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탐독(探讀)하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여 평거(平

                居)에도 관복(冠服)을 렴식(렴飾)하여 위의(威儀)가 정연(整然)하였으며, 출처(出處)와 제행(霽行)

                을 고훈(古訓)에 상고(詳考)하였다.

                중종(中宗) 5년 진사과(進士科) 장원(壯元)에 들고 동 10년에 알성과(謁聖科)에 올라 성균관(成均

                館) 전적(典籍)에 제수(除授)되였다.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고 다시 홍문관(弘文

                館)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차( 陞差)되었다.

                중종은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여 문치(文治)에 뜻을 기울였으므로 (靜庵)을 의중(倚重)하게 되

                니 정암 또한 감격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군덕(君德)을 향상시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實現)만이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중종의 특지(特旨)로써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면서, 일시에 많은 현사(賢士)를 발탁(拔擢)하

                여, 적폐(積弊)를 개혁하고 선왕의 법도(法度)를 차츰 거행하려고 하였다.

                선생은 현량과(賢良科)를 주청(奏請) 시행하여 학행겸비(學行兼備)의 현사(賢士)를 대거 등용(登

                用)케 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의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잘못 책록(策錄)된 인사들을 삭훈

               (削勳)하였다.

                이에 격탁(激濁) 양청(揚淸)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와 훈구재상(勳舊 宰相)들이 감정이 대립(對

                立)하게 되었다.

                 이때 삭훈(削勳)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모함(謀

                陷)하여 사사(賜死)케하고 많은 사류(士類)가 함께 화(禍)를 당하였으니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

              라 한다.

                그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에 시임 좌의정(左議政) 이명(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모

                두 신원(伸寃) 복권(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과 문정(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리

                고 문묘(文廟)에 종향되니 세칭(世稱)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했고 . 한훤당(寒暄堂).일두(一두).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를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4. 회재 이언적 晦齋 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

                 齋), 자계옹(紫溪翁). 관향은 여강(驪江). 성종 22년 경주 양좌촌(慶州 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원(生員)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연산(燕山) 8년에 구사재(舅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就學)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늘 산사

                 (山寺)에 거처하면서 독서(讀書)에 열중(熱中)하였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한 인동현감(仁同 縣監)·사헌부장령(司

                 憲府掌令)·밀양부사( 密陽府使) 등을 거쳐, 동 25년(1530)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擧用)에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謀略)으로 물러

                 났다.

                 동 32년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쫓겨난 뒤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

                 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였다.

                 수천언(數千言)의 상소(上疏)를 올려 국가 대본(國家大本)과 정치 강령(政治綱領)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가(特加)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과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하고 인종(仁宗) 1년(1545)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되었다.

                 이듬 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모함

                 (謀陷)하여 강계(江界)에 천적(遷謫)되었다.

                  적소(謫所)에서 그의 절필(絶筆)인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29권을 집필중(執筆中) 완성하

                  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써 타계(他界)하였는데, 1568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 시임(時任)

                  좌의정 이명(左議政 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신원 복권(伸寃 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

                  으로 추증(追贈)되고 다음 해 문원(文元)이라 증시(贈諡)되었다.

                  선조 6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고, 광해군(光海君) 2년(1610) 문묘(文廟)에 종향(從

                  享)되었다. 그의 주리(主理) 학설은 퇴계(退溪)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28세 때에 선배학자

                  (先輩學者)인 손숙동(孫叔暾)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수삼차(數三次)에 걸친 무극

                  (無極)·태극(太極)에 관하여 벌린 논쟁(論爭)에 뛰어 든 것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大論爭)

                  이라 한다.

                  후에 율곡(栗谷)은 선생을 한훤당(寒暄堂)· 일두(一두)· 정암(靜庵)과 함께 동방 사현(東方 四賢)

                  으로 추모(追慕)하였다.

                  저서로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

                  유(大學章句補遺)· 속 대학혹문(續 大學或問) 등이 있다.

 

 

5. 퇴계 이황 退溪  李滉 -퇴거계상[退居溪上]의 의미

                   연산군 7년(1501)∼선조 3년(1571) 조선(朝鮮)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자(字)는 경호(景浩).

                   호(號)는 퇴계(退溪) 또는 퇴도만은(退陶晩隱). 시호(諡號)는 문순공(文純公)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연산 7년 진사(進士) 식(埴)의 7자 1녀 중 끝으로 경상도 안동예안(安東

                   禮安) 온혜(溫惠)에서 출생하였다.

                   생후 7월에 부친을 여이고 숙부 우(호 松齋 ;生員·文科·戶曹參判; 靑海君)에게 수학(修學)하였으

                   며, 중종(中宗)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교리(校理) 전한

                   (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파직(罷職) 되었다가 다시 복직(復職)되었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곧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沒頭)하였다.

                   학문(學問)의 명성(名聲)이 높아지자 사방에서 학자(學者)들이 찾아와서 그의 학문을 배워 많은

                   석학(碩學)이 배출(輩出)되였다.

                   명종(明宗) 초에 단양과 풍기군수 등 지방관직을 거치고 이어 대사성(大司成), 부제학 (副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제학(大提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좌찬성(左贊成) 등 중요 관직을

                   차례로 제수(除授) 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대부분(전후 70여 차례) 사양(辭讓)하였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던 때(1550년) 순흥(順興)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

                   동서원(白雲洞書院 主享; 文正公 安珦 )에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하사(下賜) 받고 소수서원

                   (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까지 받아 첫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게 한 바 있다.

                   학문은 공맹학(孔孟學)을 바탕으로 하고 성리학(性理學) 특히, 정주학(程朱學)을 계승(繼承)하

                   여 심화(深化)시킴으로서 조선유학(朝鮮儒學)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主張)하였으

                   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왕에게 올렸다.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이 내려지는 한편 대신(大臣)의 예우에 따른 장례가

                   치러졌다.

                   광해(光海) 2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40여 서

                   원(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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