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묘 배향
조선에서는 문묘를 성균관에서 관장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廟宇)라고 한다.
묘우의 주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으로서 좌우에 동무·서무라는 부속 행랑을 두어 예배 대상자를 봉안한다. 그리고 향사때의 헌관과 집사(執事)들의 재계소(齋戒所)이자 향축(香祝)을 봉안하기 위한 곳으로 향관청(享官廳)이 있다.
문묘의 예배 대상자와 배향 순위
1.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을 정위(正位)로 남쪽을 바라보게 함.
2.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 및 맹자(孟子)의 4성위를 동서로 둘씩 나눔.
3. 孔門 10철(孔門十哲)과 송조 6현(宋朝 六賢)을 문선왕의 좌우로 나누어 종향(從享)한다.
4. 동·서무 양쪽 행랑에는 공문 72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명현 90여 위와 우리나라의 18명현들을 종사(從祀)한다.
한국의 18명현
1. 최치원(崔致遠)-고운,해운)·
2. 설총(薛聰)-자 총지聰智, 호 빙월당氷月堂)·
3. 안유(安裕:安珦)-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4. 정몽주(鄭夢周)-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시호 문충文忠)·
5. 김굉필(金宏弼)-자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김종직의 문인門人)·
6. 정여창(鄭汝昌)-자 백욱(伯勗), 호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7. 조광조(趙光祖)-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 김굉필의 문인
8. 이언적(李彦迪)-호 회재(晦齋), 자계용(紫溪翁), 자 복고(復古). 경주 출생.시호인 문원(文元) 옥산서원에 제향. 동방 5현의 한 분
9. 이황(李滉)-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은 진보(眞寶), 시호는
문순(文純). 진사(進士) 이식의 아들. 남인 계열의 종주. 영의정을 추증,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
10. 이이(李珥)·-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11. 성혼(成渾)·-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성리학).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12. 김장생(金長生)·-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
13. 송시열(宋時烈)·-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14. 송준길(宋浚吉)·-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서인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송시열과 함께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면서 훗날 양송(兩宋)
으로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어나갔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15. 박세채(朴世采)·-반남박씨, 좌의정
16. 김인후(金麟厚)·-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7. 조헌(趙憲)·-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18. 김집(金集)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했
으며, 그의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케 했다.
등 18명이 종사되었다.향사의 일자는 중춘(仲春)과 중추(仲秋)로 나누어 중정일(中丁日)을 잡아 석전일(釋奠日)로 정하였으며, 그 밖에 서원에서 춘추 계월(季月)의 상정일(上丁日)이나 중정일로 정하기로 하였다. 다만 서원의 향사일은 성균관·향교의 석전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그리고 향사일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면 그 다음의 정일로 잡았고 국상(國喪)이 나서 인산(因山)이 마쳐지지 않으면 신위(神位)에 고유(告由)하고 향사를 행하지 않았다. 또한 삭망분향일(朔望焚香日)이라 하여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관관(館官)·유생들이 문묘에 나아가 분향의식을 올리는 행사일이 있었다. 이 밖에 공자탄강일(孔子誕降日)에 올리는 향사는 가장 컸으며, 왕이나 세자가 직접 향사에 참례하는 친림석전(親臨釋奠)·친림작헌·왕세자석전 등이 있고 고유제(告由祭)·위안제(慰安祭)가 있다.
문묘는 성균관 대사성을 헌관으로 초헌관·아헌관·종헌관과 축·찬자(贊者)·알자(謁者)·찬인(贊引)·사존(司尊)·봉향(奉香)·봉작(奉爵)·전작(奠爵) 등의 여러 집사들이 선임되어 향사 3일 전에 재계(齋戒)에 들어간다. 제복을 착용하고 제물을 차린 뒤 전폐례(奠幣禮)·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飮福禮) 및 망예례의 단계로 진행한다. 서원으로 내려오면 더욱 간략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의식이 끝나면 음희례(飮禧禮)를 하고 강론함이 보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