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정할아버지/오우선생실기

五友先生實記序-宗人 致久

eungi5 2011. 11. 7. 16:44

 

五友先生實記序

(오우선생실기 서)

  古人 有言 曰 文 貫道1 之器 道雖尊 不以文之貫之 其何能光前而 垂後也                                      垂:드리울 수

  옛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글이란 도를 표현하는 기구이다. 도가 비록 높다해도 글로써 표현해 놓지 않으면 어찌 능히 지난 일을 빛나게 해서 후세에 전하겠는가’라고

 

   雖然 苟道之 篤行實踐者 旣施于家 又播于鄕 其遺風2善迹 至傳于百世 而有不可湮滅 則 固不待 其文之傳不傳也                                                                                                     苟(진실로 구),篤(도타올 독),播(뿌릴 파),湮(잠길 인)

  비록 그러나 진실로 도를 독실하게 실천해서 이미 가정에 시행하고 고을에도 전파되어 그 남긴 풍교와 착한 자취가 백세토록 전해지면서 사라지지 않음이 있다면 그의 글이 전해지거나 전해지지 않거나는 말할 것이 없다.

 

  高密之南 有水東出 其名 曰 三郞江 江之上 有院宇焉 乃 五先生昆季 遊息之 遺址也

  밀양 남쪽에 동에서 흐르는 는데 그 이름을 삼랑강이라 한다. 그 강가에 서원이 있는데 이곳이 오우선생 다섯 형제분이 노니시던 곳이다.

 

  先生六代祖 諱 愉 麗朝 大提學 見(皆?)世政亂 退去東村 爲後人稱 五代祖 諱 壽生 我朝 吏曹判書 高祖 諱 若孫 觀察使 曾祖 諱 謹 吏曹參議 祖 諱 除 考 諱 熲 進士 寔生 五男 生而天姿 炯異 皆近道

寔(이 식),炯빛날형,

  선생의 육대조 휘 유는 고려때 대제학이었다.

  그 때 나라 정사가 어지러음을 보고 동촌(지금의 김포)에 물러가 살았는데, 후세 사람이 칭찬한다.

  오대조 휘 수생은 아조(조선)의 이조판서였고, 고조 휘 약손은 관찰사였으며, 증조 휘 근은 이조참의 였다. 조부는 휘 제이고 부친은 휘 경인데 진사였다. 바로 이 분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타고난 자질이 밝고 기이하여 모두 도에 가까웠다.

 

  旣長 俱遊於外氏 佔畢齋34 薰灸大方 聞道先就 所與遊 一時名儒 每以學問見推 事兩親至孝 生葬盡以禮

薰(향풀훈),灸(뜸구),(推:옳을추)

  라면서 진외종조부 점필재의 문하에서 함께 배웠다. 큰 학자의 가르침을 받아 도를 들으면 남먼저 깨우치니 함께 배우던 그 때 선비들도 그의 학문을 매우 칭찬하였다. 양친을 섬기면서 효성이 지극하여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실 때나 예법대로 다 하셨다.

 

  至乃友愛之篤 根於天性 少而至老 未嘗異其産業 食卓寢被 必同之 (構)一亭而共居之 塤唱篪和5 講磨經義 彌日6不暫休                                                             嘗맛볼 상,搆이끌 구,塤(질나발 훈, 壎과 同字),篪(대이름 지),(彌:두루미),暫잠시잠

  그리고 그들의 두터운 우애는 타고 난 성품이어서 어려서부터 늙었을 때까지 살림을 따로 내지 않았고, 밥상과 밤자리를 반드시 함께했고 정자 하나를 지어서 함께 있었다. 훈을 불면 지로 화답하며 경서를 강론하면서 종일토록 잠시도 쉬지 않았다.

 

  時當戊甲7之間 畢門諸賢 擧被羅織8 而惟先生伯季五人 絶意仕,進 超然自娛, 又作9 以叙 其湛樂之情, 又寓 其相戒之義, 其見幾 守道之情 又如此矣

仕(벼슬 사),娛(즐거워할 오),鶺鴒(할미새 척, 할미새 령),叙(베풀 서),湛(즐길 담),寓(머무를 우),幾(기미, 낌새 기)

  그때 무오, 갑자사화를 당하여 점필재 문하 여러 현인이 거의 다 죄에 얽혀 들었으나 선생의 형제 다섯 분은 벼슬길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세속을 벗어나서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척령가를 지어 서로 즐거워하는 뜻을 표현하고 서로 경계하는 뜻을 가지기도 하였으니, 그 기미를 보고 자신의 도리를 지킨 정신이 또 이와 같았다.

 

  嶠南10人士 雖素所不知者 皆以爲範式 至于村傖里儒 莫不心悅而景仰焉

任相國虎臣 曾按玆道 慕名躬造 不勝敬歎 手扁 其亭曰五友 皆摭,實語也

遂聞于朝 除命屢降 而皆不就而 終

嶠(뾰족하게 높을 고),素평소소,範(법 범),式(법 식),傖(천할 창),按(누를 안),

躬(몸소 궁),歎(읊을 탄),扁(넓적할 편),摭(주울 척),屢(창 루)

  교남(영남)인사로서 평소에 선생을 모르던 자도 모두 본보기로 했고, 두메산골 사람들까지도 마음속으로 좋아해서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승 임호신이 일찍이 본도 감사로 있으면서 선생의 명망을 흠모하여 직접 와서 보고 못내 경탄하였다.

  그리하여 정자에다 손수 오우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실제를 표현한 말이었다.

  드디어 조정에 보고하여 벼슬을 재수하는 명이 여러 번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생을 마쳤다.

 

  嘉靖癸亥11 鄕人 謂可祭於社 創爲廟祠 又竪碑以俎豆之

  後値()龍蛇之燹 亭與廟俱燼 碑亦爲之泐

  於是焉 五先生 唱酬之文墨 敍述之幾編 蕩然 無隻字可攷 可勝惜哉

  先生之 學問 雖高 不有文獻之可徵 則 後之人 其何以倣焉

靖편안할정,竪(더벅머리 수. 豎의 俗子),俎(도마 조),燹(야화 선),

燼(깜부기불 신),泐(돌갈라질 륵),倣(본뜰 방)

酬(갚을 수),蕩쓸어버릴탕,隻(새한마리 척, 한사람 척),攷(상고할 고, 考의 古字)

  가정 계해년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에 제사할 만하다하여 사당을 창건하고 또 비를 세워 향사하였다.

  그후 임진년 왜란을 당해 정자와 사당이 함께 불탔고 비석도 부서져 버렸다.

  이리하여 다섯 선생이 서로 부르고 화답한 글과 글씨, 저술한 책 몇 권이 모두 없어져서 한 글자도 상고할만한 것이 없으니 애석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선생의 학문이 비록 고명했어도 징빙할만한 문헌이 없다면 후세 사람이 무엇으로써 본을 삼겠는가.

 

  嘻嘻 我知之矣 嗣後 幾十載 士論齊發 重建亭廟 老先生寒水齋12 手書其祠曰 三江 揭堂曰 象友 因記于石 而吾宗貞庵公遇洙13撰之 金相國14鎭商15篆之 最其著見而易知者也                                    嗣(이을 사),載(실을 재),撰(지을 찬)

  아아 나는 알고 있다. 그 후 수십년 만에 선비들의 의논이 일제히 일어나, 정자와 사당을 다시 세웠고 한수재선생이 사당에는 ‘삼강’, 강당에는 ‘상우’라는 현판을 손수 썼으며, 또 돌에다 그 사실을 기록했는데, 우리 종친 정암공 우수가 글을 짓고, 정승 김진상이 전자를 썼다. 이것이 나타 난 사실로써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卽其時畢齋之孫 璞齋金紐集中 五友文集序 卽是已洎 夫牧伯之出題試士 衿紳16之聯韻揭板 章章然耀人耳目 而環是亭 一鄕之俗 至于今敦親而愷悌 行路之過是廟者 亦無不指點 而興感焉

夫然後孰謂我先生之道 無文字可傳也歟                                                                                     

洎물부을계,璞(옥돌 박), 洎(물부을 계),紳(큰띠 신),韻(운운),章(글장),耀(빛날 요),

愷(즐거울 개)悌(공경할 제), 歟(어조사 여)

  그 때 점필재의 손자인 박재 김뉴의 문집 속에 ‘오우문집서’란 것이 곧 이것이다.

  그리고 부사가 제목을 오우정이라 내어 선비를 시험한 것과 금신들이 운시를 잇달아 지어서 이 정자에 빙돌아 걸은 현판들이 사람의 눈을 밝게 비친다.

  한 고을의 풍속이 지금까지 친족끼리 정을 두텁게 하고 화목하게 하며, 길가는 사람도 이 사당 앞을 지나가는 자는 사당을 가리키면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니 누가 감히 선생의 도를 전할만한 문자가 없다고 이르겠는가.

 

  嗚呼 道不存而 文在則空言也 文不在而道存則至行也 先生之文 雖不幸不傳於世 而先生之之德之行 自不能不傳於世 則由乎百世之後 聞先生之風者 孰不曰文在玆矣乎 若乃尋行於記誦章句之間 則是亦文之末也已

孰(누구 숙),玆(이에 자), 尋(찾을 심),記(적을 기),誦(욀 송)

  아아, 도는 남아있지 않은데, 문자만 있음은 헛말이지만, 문자는 없어도 도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지극한 행실이 아닌가.

  선생의 문장은 비록 불행하게 세상에 전해오지 않지만 선생의 덕과 행실은 저절로 세상에 전해 온다.

  그런 즉, 백세 후에라도 선생의 풍교를 듣는 자는 누구인들 ‘문장이 여기있다.’라고 하지 않으랴.

  기억하거나 외우는 글귀에서 글줄이나 찾는 것 같음은 또한 문장의 끝일 뿐이다.

 

  友于亭後孫致洪17泳純18 不遠其來 屬余作文以幷 余亦大提學後孫也 爲敦同宗之誼 不能以無文辭 是爲序

  우우정의 후손 치홍과 영순이 천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지어 주기를 부탁한다. 나도 대제학의 후손이라 같은 종족의 친의를 두텁게 하기 위하여 글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서문한다.

 

  輔國崇祿大夫 行 知中樞府事 兼 廣州府留守 南漢守禦使 宗人 致久19 謹序

  보국숭록대부 행 지중추부사 겸 광주부유수 남한수어사 종인 치구 삼가 서문함.

  1. 도: 일용 사물에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할 도리 [본문으로]
  2. 풍: 風敎, 즉 덕행과 학문으로서 풍속을 교화함. [본문으로]
  3. 점필재: 金宗直의 호, 密陽 사람. 性理學者이고 벼슬이 刑曹判書 知中樞府事에 이름. 東國輿地勝覽 55권을 增修 書畵에도 능했음. 弔衣祭文을 지은 것으로 인하여 戊午士禍 때 剖棺斬屍를 당했음. 密陽禮林書院 이외에 선산, 함양, 금산, 개령 등 여러 곳 書院에 享祀했음. 諡號는 文忠이고 五友先生의 陳外從祖父임. [본문으로]
  4. 門下: 스승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일컫는 말. 門人, 門弟, 門生 弟子와 같은 말. [본문으로]
  5. 훈창지화: 塤을 불면 篪로 和答하다. 훈은 질나발, 지는 저, 兄弟間에 和睦하게 지내는 것을 일컫는 말. (詩經小雅何人斯章, 白氏吹塤 仲氏吹篪) [본문으로]
  6. 미일: 온종일 [본문으로]
  7. 士禍: 朝鮮王朝前期에 선비들이 당한 禍變, 1498년 유자광, 이극돈 등이 일으켜서 김종직 일파 수십명을 처형한 戊午士禍, 1504년 도 김종직 문하 수십명을 처형한 甲子士禍, 1519년 남곤, 심정 등의 음모로 조광조 일파 수십명이 처형된 己卯士禍, 1545년 윤임 일파가 윤원형의 모략으로 처형된 乙巳士禍가 있음. [본문으로]
  8. 라직: 없는 죄를 꾸며 만듬. [본문으로]
  9. 척령가: 척령은 물새의 이름, 詩經小雅棠(팥배나무당)棣(산앵두나무 체)章에 척령이 두덕에 있어 형제가 위급한 난을 서로 구원한다 했는데 형제간에 서로 도와서 잘 지내는 것을 노래한 것임. [본문으로]
  10. 교남: 영남, 조령의 남쪽 [본문으로]
  11. 가정계해: 가정은 명나라 세종의 년호, 즉 가정 42년이 개해년이라는 뜻이며 1563년임. [본문으로]
  12. 寒水齋선생: 이조인조, 경종 때 사람. 權尙夏의 호, 遂庵이라는 호도 있음. 尤庵 宋時烈의 수제자로서 기호학파의 지도자였음. 충주 루암서원 외 청풍 정읍, 성주, 보은, 예산, 송화 등지 각 서원에서 配享했음. 시호는 문순 [본문으로]
  13. 우수: 1694(숙종 20) ~ 1756(영조 32)자는 사원, 호는 정암. 문충공 진후의 아들이며, 20세 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권상하를 사사하였다. 1726년(영조 2) 봉릉참봉 및 세자사마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명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물러나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으로 승차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제주·세자찬선·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1758년 특명으로 사헌부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 시호는 문간이다. [본문으로]
  14. 상국: 일반인 오를 수 있는 벼슬보다 한단계 위의 벼슬, 보통 개국공신 등에게 주어진다. [본문으로]
  15. 김진상:본관은 광산.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 김장생의 현손이며, 할아버지는 참판 김익훈(金益勳)이다. 아버지는 김만채(金萬埰)이며, 어머니는 이항(李杭)의 딸이다. 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문신. [본문으로]
  16. 금(옷깃 금)신: 衿은 靑衿 즉 선비를 일컫는 말이고, 紳은 搢紳(꽂을 진)으로서 官吏를 일컫는 말. [본문으로]
  17. 치홍:友于亭 10代孫-次宗派(裕-應湛-仁復-孝曾-輯-友華-涵洙-百鎭-良魯-致洪) [본문으로]
  18. 영순:‘遺事 後 小識’을 지은 守鏞의 子-宗派: 友于亭 12代孫(裕-應湛-仁復-孝先-輶-友參-光洙-百宜-廣魯-致奎-守鏞-泳純) [본문으로]
  19. 致久:민치구(閔致久) / 1795(정조 19) ~ 1874(고종 11)첨지중추부사 단현(端顯)의 아들로 승호·겸호의 아버지이고 흥선대원군의 장인이며 고종의 외할아버지이다. 1863년(곶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1864년 공조판서로 특진하여, 이듬해 광주부유수가 되었다. 1867년 청주목사가 된 뒤 이듬해 판의금부사·판돈령부사를 역임한 뒤 1869년 다시 공조판서를 지내고, 판돈녕부사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헌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