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정할아버지/오우선생실기

五友先生의 生涯와 思想-十四代孫 丙蘇

eungi5 2011. 11. 7. 16:01

 

五友先生의 生涯와 思想                                                                                                    涯물가애

 

  宇宙의 至善 至美한 秩序는 萬古不變으로 오늘도 正確히 維持되고 있으나 여기서 生을 營爲하고 있는 우리 人生은 참된 삶의 價値를 깨닫지 못하고 目前의 浮榮에 眩惑되어 社會의 倫理는 頹敗를 거듭하고 있음이 率直한 現實일 것이다.                                                                                                     眩아찔할현,惑미혹할혹

 

  옛날 우리 先人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暗黑世界에 彗星같이 나타나 宇宙의 極致原理와도 같이 至極히 착하고 至極히 아름답게 한 平生을 살고 간 분이 없지 않으니 그 중에서도 恒常 그 遺德을 追慕케 한 분이 五友先生이다.                                                                                                                             彗비혜,

 

  五友先生은 李朝 成宗朝부터 明宗 초기에 걸쳐 密陽에서 사셨든 勗齋 閔九齡과 그 아우 敬齋 九韶, 友于亭 九淵, 無名堂 九疇, 三昧堂 九敍의 五兄弟 분을 일컫는 바, 이 분들은 모두 佔畢齋 金宗直先生 門人으로 寒暄堂, 一蠹, 梅溪, 濯纓 등 當代 名儒와 더불어 道義로 交遊하였다.                         暄따뜻할훤,蠹좀두,濯씻을탁,纓갓끈영,

 

  五友先生은 父母님을 至極孝誠으로 奉養하였으니 그 實例를 일일이 記錄할 수 없으나 한 두가지 만을 例擧하면 한 번은 父 進士公께서 심한 吐瀉症狀으로 氣脫하여 瀕死狀態에 至하였을 때 그 五兄弟가 일제히 斷指獻血하여 起死回生하신 일이 있고, 또 모 李氏께서 癰疽로 오래 고생하시게 되자 五兄弟가 번갈아 膿汁을 입으로 吸取하여 未幾에 完治되게 하였다.                                           瀕물가빈,癰등창옹,疽등창저,膿고름농,吸숨들이쉴흡,

 

  喪을 當하여서는 6年 居廬하여 哀와 禮를 다하니 世人이 稱頌하였다. 兄弟間 友愛 또한 至極하여 父 進士公께서 各己 分財하여 各産할 것을 命令하였으나 五兄弟는 ‘옛날 君子는 八代 同居로 和睦하게 지난 이도 있는데, 어찌 兄弟가 各産分居하여 네 것, 내 것을 가리라 하십니까?’라 하며 끝내 分財를 하지 않고 平生 共有로써 서로 讓步하고 節儉하며 지났다.                                                                                         廬오두막려,

  中年 以後에는 三郞江 기슭 옛 三郞樓 舊址에 一亭을 營建하여 五友亭이라 扁하였다. 五兄弟가 이 곳에서 恒常 한 벼개 한 이불로 同寢하고 한 밥상으로 同食하였다. 鶺鴒歌 一章을 지어 相和相答之義를 다 하였으며 塤唱篪和로 湛樂之情을 다 하였으며, 講磨經義로 後學敎導에 專念하니 온 나라에 그를 稱美함이 대단하였다.

 

  그때(明宗 2년, 1547년)에 慶尙道 觀察使 任虎臣이 그 所聞을 듣고 事實 與否를 確認코자 밤중에 그 寢所를 갑자기 찾아가니 果然 共被同寢하는지라 이를 目覯하고 크게 驚歎하여 그 자리에서 ‘五友亭’이라는 大懸板을 手書하고 亭贊四韻을 지어 致賀한 다음 돌아가서 朝廷에 그 事實을 報告하니 朝廷에서도 五兄弟에게 各各 官職을 除授하여 이를 襃彰하였으나 官職에 나아가 自身의 榮華를 누리기 보다 오히려 後學을 敎導하여 懦弱한 民心을 굳건히 하고 野薄한 人情을 敦篤케 하여 紊亂한 風習을 바로 세움이 더욱 時急하고 더욱 중요하다 하여 끝내 官職을 辭讓하고 初志一貫 湖山과 더불어 아름답게 天壽를 다 하였다.

認알인.襃기릴포,彰밝을창,懦나약할나,紊어지러울문,

  鄕人이 그의 遺德을 追慕하고 길이 본받기 위하여 明宗18년(1563년)五友亭 옆에 記事碑를 세우고 五友祠를 지어 春秋享禮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壬辰倭亂(1592년)때에 廟와 亭과 碑가 燒失되고, 詩文과 往復簡札이 아울러 灰燼하였으며 그 當時 그의 子與孫 三十餘人도 겨우 二, 三人이 慘禍를 免하였을 뿐이다.              燒사를소,簡대쪽간,札패찰,燼깜부기불신,

  그 慘酷한 亂痕을 復舊할 힘이 없어 半世紀가 넘도록 廢墟의 풀 속에 礎石만이 옛 일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慘참혹할참.酷독할혹,墟언덕허,礎주춪돌초,

  그 때(孝宗 1년:1650년) 密陽府使 崔煜이 到任하여 이 사실을 듣고 五友亭 遺址를 尋觀하니 雜草만 茂盛한지라, 感慨無量하여 還衙後 ‘登五友亭遺址有感’이라는 題目으로 鄕中 儒生을 모아 白日場을 보이니 그때 壯元한 孫, 李而禎의 有名한 詩는 지금도 여러 사람의 입에서 愛誦되고 있다.

茂우거질무,慨분개할개,衙마을아.禎상서정,誦욀송,

  이로 말미암아 五友亭의 復建과 復享을 熱望하는 鄕中 士林의 輿論이 峻發하여 肅宗元年(1675년)에 五友亭이 重建되고 肅宗28年(1702년)에는 士林公議로써 五先生을 三江書院에 入享케하여 以來 四百餘年間 先生을 追慕하는 後學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峻높을준,

  이 세상 그 누구인들 父母가 없으며, 兄弟가 없으리오마는 五友先生처럼 그 父母님의 뜻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고, 生時에 至誠奉養했고, 當喪해서는 슬픔과 禮法을 極盡히 다 하였다. 父母님 死後에는 그 遺至를 받들어 言行擧措를 誠敬敦篤히 하여 後世에 까지 그를 追慕하게 하니 이 以上의 孝道가 어디 있겠는가.   措둘조,

  부모님께 孝道하기는 오히려 쉽지만 兄弟間에 各自 見解가 다를 수도 있고, 또 利害關係도 있는지라 단 두형제간에도 사이가 圓滿하기가 至極히 어려운 것이 事實인데, 五兄弟분이 平生 分財를 하지 않고, 한 분도 빠짐없이 한 벼개 한 이불에 쉬시고 한 밥상에 나란히 차례대로 앉아서 즐겁게 食事하면서 기러기와도 같이 우애롭게 한 平生을 지나셨으니 果然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일일까, 東西古今에 이와 같은 분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더욱이 五友先生은 富貴功利를 決然히 超脫하셨다. 그 당시 佔畢齋 門人이라면 登科하여 進士榮達하기야 確保된 高地라 해도 過言이 아니건만 先生은 世上榮華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科擧에 應試조차 핞으시고 오직 孝, 오직 友, 오직 學問, 오직 後學敎導의 一念으로 지내시면서 除授된 官職도 미련없이 抛棄하시니 先生은 眞情 見幾而作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 至毒했던 戊午, 甲子士禍도 先生을 羅織하지는 못했다.

抛던질포,棄버릴기,

  五友先生은 儒家에 스승이요, 道家의 至人이다. 學과 道를 兼全한 哲人이었다.

  人倫道德은 찾아보기 힘들고 物質萬能, 權威萬能의 混濁한 現世代에 사는 우리들로써 마땅히 五友先生의 精神을 본받아 아름다운 社會, 人情이 넘치는 社會를 이룩하도록 힘써야 옳을 것이다.

 

西紀 1980年 11月 日

 

十四代孫 丙蘇1 謹識

 

  1. 丙蘇:우우정14대손: 九淵-裕-應湛-仁復-孝曾-輯-友華-涵洙-百鎭-良魯-致洪-象鎬-泳熙-演植-丙蘇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