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五友先生은 李朝 成代-明代에 孝友로 이름 높은 密陽 世居 驪興閔氏 勗齋 九齡, 敬齋 九韶, 友于亭 九淵,
無名堂 九疇, 三梅堂 九敍 五昆季를 이름이다. 驪가리말여.韶풍류이름소,疇밭두둑주,
五友先生은 일찌기 안으로 兩代 大提學 諱頔, 諱愉 父子를 비롯한 여러 名祖의 溫慈한 敎訓을 繼承하고
밖으로 金江湖, 畢齋 父子의 崇高한 學問을 傳受하여 表裏가 姱美하였던 만큼 孝와 友는 自然스러운
日常行儀라 하겠다. 그러나 어버이를 위하여 斷指 吮疽도 서슴지 않았으니 孝誠이 極에 달했고 兄弟五人이
한 平生 起居寢食을 함께하며 變함없이 友愛를 다하였음는 實로 古今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頔아름다울적,愉즐거울유,姱아름다울과,吮빨연,疽등창저,
人間의 至樂이 倫理의 따사로운 보금자리에 있는 것이요, 결코 어떤 高遠한 境地에 있는 것이 아님을 五友
先生으로 미루어 실감케 한다 하겠다.
이렇듯이 百行이 갖추어진 다섯 胞兄弟가 저 園林이 鬱蒼하게 가리워진 鄕曲에서 沈淪한 것은 실로 그 當時
社會를 위하여 哀惜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이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큰 일을 맡을 참된 人才는 반드시
孝友의 家門에서 구해야 되기 때문이다. 淪물놀이윤,
어버이와 同氣를 衷心으로 사랑했던 선비가 이 나라 이 사회를 사랑하지 않을리 없겠지만, 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遯世無憫의 길을 擇한 것은 그 當時 社會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混濁한
社會에서 오히려 五友先生은 天賦의 彛衷을 遺憾없이 다 하였으니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遯달아날둔,憫근심할민,擇가릴택,賦구실부,彛떳떳할이,衷속마음충,憾한할감.
이 事實을 目擊하고 驚歎을 禁치 못한 觀察使 任虎臣은 朝廷에 狀啓하여 官職이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으셨다. 擊부딪칠격,
歿後에 鄕士가 遺德을 追慕하여 五友亭 옆에 祠宇를 세우고 俎豆하였으니 때는 明宗 癸亥였다.
그 뒤 壬辰의 兵亂을 겪어 亭과 碑가 모두 烏有로 돌아갔으나, 肅宗 乙卯에 復故되었고 다만 끼친 詩文은
亡逸한 채 다시금 攷究할 길이 없어 鄕士의 歎惜한 바 오래되었다. 逸달아날일,攷상고할고,究궁구할구,惜아낄석,
高宗 甲戌에 이르러 後孫 致洪氏가 비로소 ‘五友先生實記’를 蒐集 刊行하였으나 이제 이미 百餘星霜이
흐르는 동안에 이 역시 稀覯本이 되었을 뿐 아니라 專漢으로 된 原典이 現代人에게는 거의 難讀書가 되었다.
이를 걱정한 鄕士와 後孫이 精誠을 모아 쉬운 한글로 옮기고 不侫에게 序를 請할제 삼가 原典을 參考하고
아울러 사사로이 느낀 바를 敍述하여 江湖諸賢에 널리 알리는 바이다. 蒐꼭두서니수,覯만날구,侫아첨할녕,
1980년 庚申 小春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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